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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좋아하는 사람 모여라~~

26.09.29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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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거북

전쟁사에 관한 요약, 토론 모두 환영합니다!!!

PLAYIO_VETERANLv.82

비온뒤눈보라

1장. 1차 십자군 전쟁의 시작

11세기 후반 서유럽과 동지중해의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셀주크 튀르크가 소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군사적 압박을 받았고,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서유럽에 지원을 요청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고 동방의 기독교인을 돕기 위한 원정을 호소했다. 그의 연설 이후 기사와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도 원정에 참여하려 했다. 참가자들의 동기는 신앙만이 아니었다. 죄의 사면을 기대한 사람도 있었고, 토지와 재산, 명예를 얻으려는 기사와 귀족도 있었다. 이렇게 여러 계층이 모인 대규모 원정이 제1차 십자군으로 이어졌다. 교황의 호소는 당시 유럽 사회의 종교적 열정과 정치적 경쟁을 동시에 자극했다. 특히 기사 계층에게 십자군은 신앙을 실천하는 기회인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원정에 모였다는 점이 제1차 십자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2026.09.30 오전 11:55 · 조회 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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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7 -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5 에티오피아의 해방과 전쟁의 종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전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크게 변했다. 1940년 이탈리아가 영국에 선전포고하면서 동아프리카에서도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은 에티오피아 저항 세력과 협력했고, 해외에 있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도 에티오피아로 돌아와 독립 회복을 추진했다. 1941년 초 영국군과 에티오피아군은 여러 방향에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공격했다. 이탈리아군은 케렌 전투 등에서 저항했지만 점차 주요 거점을 잃었다. 1941년 4월 이탈리아군은 아디스아바바를 포기했고, 5월 5일 하일레 셀라시에는 수도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일부 이탈리아군이 저항했지만 주요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식민지 지배 체제는 붕괴했다. 1941년 말에는 이탈리아의 동아프리카 지배가 사실상 끝났고 에티오피아는 다시 독립을 회복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의 식민지 건설로 시작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 속에서 이탈리아의 패배와 에티오피아의 독립 회복으로 마무리되었다.

2026.09.30 오전 11:47 · 조회 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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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7 -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4 아디스아바바 함락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1936년 5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이탈리아군의 위협을 직접 받게 되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연맹에서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해외로 떠났다. 5월 5일 이탈리아군이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정규군은 사실상 조직적인 저항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정복을 선언하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건설했다.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가 하나의 식민지 체제 아래 묶이면서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에서 광범위한 영토를 확보했다. 그러나 수도가 함락되었다고 해서 에티오피아의 저항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각지에서 무장 저항 세력이 활동했고, 이탈리아군은 점령지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강압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특히 1937년에는 아디스아바바에서 이탈리아 총독에 대한 암살 시도가 발생한 뒤 대규모 보복이 벌어져 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 이후에도 에티오피아 곳곳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2026.09.30 오전 11:46 · 조회 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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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7 -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3 마이체우 전투와 에티오피아의 패배

1936년 초 에티오피아군은 북부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반격에 나섰지만, 이탈리아는 항공기와 포병을 활용해 에티오피아군의 집결지와 보급선을 공격했다. 특히 이탈리아군은 국제법상 논란이 큰 화학무기까지 사용했으며, 에티오피아 측은 국제연맹에 이를 거듭 항의했다. 1936년 2월부터 3월까지 벌어진 마이체우 전투에서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군에 맞섰지만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탈리아군은 북부에서 빠르게 남하했고, 남부에서도 그라치아니의 군대가 에티오피아군을 밀어붙였다. 에티오피아군은 산악 지형과 게릴라전을 활용하려 했지만 이탈리아의 항공 지원과 기계화 전력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결국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방어할 수 있는 정규군의 전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탈리아군의 진격이 계속되면서 에티오피아 정부는 수도의 함락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민간인 피해도 커지면서 전쟁의 참상 역시 더욱 심각해졌다.

2026.09.30 오전 11:46 · 조회 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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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7 -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2 이탈리아의 침공과 국제연맹의 대응

1935년 10월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북부에서는 에밀리오 데 보노가 이끄는 군대가 에리트레아에서 남하했고, 남부에서는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소말릴란드에서 진격했다. 이탈리아는 전차와 항공기, 중포 등 현대적인 무기를 대규모로 투입해 에티오피아군의 방어선을 압박했다. 에티오피아군은 병력 규모에서는 상당했지만 무기와 탄약, 통신 장비가 부족했고 부대 간 지휘 체계도 충분히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의 침공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경제 제재를 결정했지만, 제재 대상에서 석유가 빠지는 등 실효성에 한계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이탈리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탈리아는 북부와 남부에서 동시에 공격을 확대했고, 에티오피아군은 점차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의 규모가 커질수록 양국의 군사력 차이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2026.09.30 오전 11:46 (수정됨) · 조회 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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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7 -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 무솔리니의 침공 준비

1930년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을 이끈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식민지를 확대하려 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에리트레아와 소말릴란드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1896년 아드와에서 패배한 뒤 독립을 유지한 에티오피아를 다시 정복하려 했다. 무솔리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국력과 제국을 과시할 기회로 보았다. 1934년 12월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의 국경에서 월월 사건이 발생하자 이탈리아는 이를 침공의 구실로 활용했다. 에티오피아는 국제연맹에 이탈리아의 위협을 호소했지만 상황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와 소말릴란드에 병력과 장비를 대규모로 집결시키고 전쟁을 준비했다. 1935년 여름에는 병력과 군수품의 배치가 사실상 완료되었고, 이탈리아의 침공은 임박했다. 결국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군은 에리트레아와 소말릴란드 방면에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면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2026.09.30 오전 11:45 · 조회 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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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5 - 미국 독립전쟁 5 요크타운과 미국의 독립

1781년 미국 독립전쟁은 결정적인 국면에 들어섰다. 영국군의 찰스 콘월리스는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 병력을 배치했지만,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미국군과 프랑스군이 요크타운을 포위했다. 프랑스 함대가 체서피크만에서 영국 함대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콘월리스의 군대는 외부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다. 결국 1781년 10월 19일 콘월리스는 항복했고, 요크타운 전투는 미국 독립전쟁의 결정적인 승리가 되었다. 전투 이후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는 데 큰 부담을 느꼈다. 미국과 영국은 평화 협상을 진행했고 1783년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미국은 국제적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독립전쟁은 식민지의 저항에서 시작해 새로운 국가인 미국의 성립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미국의 정치 체제와 국제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26.09.30 오전 11:11 · 조회 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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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5 - 미국 독립전쟁 4 프랑스의 참전과 전쟁의 국제화

미국 독립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은 프랑스의 참전이었다. 미국은 영국과 싸우면서 프랑스의 지원을 얻기 위해 외교 활동을 벌였고, 사라토가 전투에서 미국군이 영국군을 물리치면서 프랑스의 지원이 더욱 확대되었다. 1778년 프랑스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에 선전포고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무기와 군수품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병력과 함대를 파견해 영국과 직접 싸웠다. 이후 스페인과 네덜란드도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미국 독립전쟁은 북아메리카에만 국한되지 않는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은 유럽과 카리브해, 인도 등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했고 군사적 부담이 커졌다. 미국군 역시 프랑스의 지원을 바탕으로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해군은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2026.09.30 오전 11:11 · 조회 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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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5 - 미국 독립전쟁 3 독립선언과 전쟁의 확대

1776년 식민지와 영국의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7월 4일 대륙회의는 토머스 제퍼슨 등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채택하고 13개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고 선언했다. 선언서는 인간의 평등과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강조하고 정부가 이러한 권리를 침해할 경우 국민이 정부를 바꿀 수 있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은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뉴욕 전투 등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병력과 물자의 부족에 시달렸다. 하지만 워싱턴은 병력을 유지하면서 장기전을 이어갔고, 식민지 각지에서는 영국에 맞서는 저항이 계속되었다. 독립을 선언한 미국은 이제 전쟁을 통해 실제 독립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2026.09.30 오전 11:10 · 조회 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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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5 - 미국 독립전쟁 2 렉싱턴과 콩코드, 전쟁의 시작

영국 정부는 식민지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강화했다. 1775년 4월 영국군은 식민지 민병대가 보관하던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콩코드로 진군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렉싱턴에서 식민지 민병대와 충돌했고, 총격이 발생하면서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콩코드까지 진격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식민지 민병대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후 보스턴 주변에는 식민지 민병대가 모여 영국군을 포위했고, 양측은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다. 같은 해 6월에는 벙커힐 전투가 벌어져 영국군이 전장을 장악했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각 식민지의 군대를 하나의 지휘 체계 아래 통합하려 했다.

2026.09.30 오전 11:10 · 조회 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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