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좋아하는 사람 모여라~~
26.09.29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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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거북
전쟁사에 관한 요약, 토론 모두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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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17 - 유스티니아누스의 확장전쟁 1 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되찾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27년 동로마 황제로 즉위한 뒤 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되찾는 일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당시 제국은 발칸,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등을 지배했지만 서방의 넓은 지역은 게르만계 왕국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권과 로마법을 정비하는 동시에 지중해의 옛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이를 위해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같은 유능한 장군을 기용했고, 외교와 군사력을 함께 활용했다. 먼저 동쪽의 사산 왕조와 일시적인 평화를 이루어 서방 원정에 집중할 여건을 만들었다. 이후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영토 회복에 나섰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정복을 넘어 지중해의 주요 항구와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제국의 경제력과 전략적 위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결국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에스파냐 일부를 다시 제국의 지배 아래 두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 정책은 이후 로마의 지중해 지배 전통을 다시 강조하는 상징적 의미도 지녔다.
2026.10.02 오전 9:35 · 조회 수 1
비온뒤눈보라
2차 십자군전쟁 5장. 다마스쿠스 공격 결정
1148년 예루살렘에 도착한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지도자들과 앞으로의 군사 작전을 논의했다. 원래 제2차 십자군의 목적은 에데사를 되찾는 것이었지만, 이미 에데사는 장기의 세력 아래 놓여 있었고 원정군의 전력도 크게 줄어 있었다. 이에 지도자들은 새로운 공격 목표를 찾았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다마스쿠스를 선택했다. 다마스쿠스는 시리아의 중요한 도시이자 정치와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면 예루살렘 왕국의 방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는 십자군에 항상 적대적인 세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에는 십자군과 협력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공격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럼에도 군사적 성과가 필요했던 십자군 지도자들은 공격을 결정했다. 1148년 7월 십자군은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군했다. 이 결정은 현지 정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십자군 내부의 갈등을 더욱 크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2026.10.01 오후 8:45 · 조회 수 1
비온뒤눈보라
2차 십자군전쟁 4장. 프랑스군의 행군
1147년 콘라트 3세가 이끄는 독일군이 먼저 동쪽으로 출발했다. 대규모 병력은 헝가리와 비잔티움 제국을 지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소아시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행군 과정에서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 사이에 긴장이 생겼고, 식량과 보급품을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독일군은 소아시아에 들어선 뒤 셀주크 튀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1147년 10월 도릴라이움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독일군은 적의 기습과 지형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크게 패했다. 많은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콘라트 3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니케아로 후퇴했다. 독일군의 패배는 원정 초기부터 십자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당시 소아시아는 유럽군에게 낯선 지역이었고, 현지의 기후와 지형도 익숙하지 않았다. 셀주크군은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 정면 대결보다 기동 공격을 펼쳤다. 결국 독일군은 당초 계획했던 대규모 진격을 이어가기 어려워졌고, 이후 프랑스군과 합류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2026.10.01 오후 8:45 · 조회 수 2
비온뒤눈보라
2차 십자군전쟁 3장. 독일군의 패배
1147년 콘라트 3세가 이끄는 독일군이 먼저 동쪽으로 출발했다. 대규모 병력은 헝가리와 비잔티움 제국을 지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소아시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행군 과정에서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 사이에 긴장이 생겼고, 식량과 보급품을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독일군은 소아시아에 들어선 뒤 셀주크 튀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1147년 10월 도릴라이움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독일군은 적의 기습과 지형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크게 패했다. 많은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콘라트 3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니케아로 후퇴했다. 독일군의 패배는 원정 초기부터 십자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당시 소아시아는 유럽군에게 낯선 지역이었고, 현지의 기후와 지형도 익숙하지 않았다. 셀주크군은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 정면 대결보다 기동 공격을 펼쳤다. 결국 독일군은 당초 계획했던 대규모 진격을 이어가기 어려워졌고, 이후 프랑스군과 합류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2026.10.01 오후 8:44 · 조회 수 1
비온뒤눈보라
2차 십자군전쟁 2장. 유럽의 원정 호소
에데사 함락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145년 교황은 칙서를 발표하여 성지를 방어하고 잃어버린 에데사 지역을 되찾기 위한 원정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이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유럽 여러 지역을 돌며 십자군 참여를 설교하면서 원정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십자군 참여를 결정했고, 신성로마제국의 콘라트 3세도 뒤이어 원정에 나서기로 했다. 제1차 십자군과 달리 이번에는 유럽의 국왕들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기 때문에 훨씬 조직적인 원정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목적은 모두 같지 않았다. 종교적 신념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지만 왕권과 귀족의 명예, 정치적 영향력, 영토 확보 등을 고려한 세력도 있었다. 여러 국가의 군대가 하나의 원정에 참여하면서 지휘권과 보급 문제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렇게 유럽의 대규모 병력이 동방을 향해 출발했다.
2026.10.01 오후 8:44 · 조회 수 1
비온뒤눈보라
2차 십자군전쟁 1장. 에데사 함락과 새로운 위기
제1차 십자군 이후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지만, 이들은 주변의 이슬람 세력과 계속 충돌했다. 특히 북부의 에데사 백국은 다른 십자군 국가보다 방어가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12세기 중반 이슬람 세력에서는 모술과 알레포를 장악한 장기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144년 12월 장기는 에데사를 공격했고, 십자군 측의 방어를 무너뜨린 뒤 도시를 점령했다. 에데사 함락은 십자군 국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에데사는 제1차 십자군 이후 세워진 최초의 십자군 국가였기 때문에 그 상실은 단순히 한 도시를 잃은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예루살렘 역시 북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대한 방어가 약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유럽에서는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것이 제2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026.10.01 오후 8:44 · 조회 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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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16 - 제2차 포에니전쟁 10 로마의 지중해 패권
제2차 포에니전쟁은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한 뒤 트레비아, 트라시메노, 칸나이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로마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로마는 막대한 인력과 동맹망을 바탕으로 장기전을 선택했고,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결정적인 정치적 붕괴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버텼다. 동시에 스키피오는 이베리아를 장악한 뒤 아프리카로 전쟁을 옮겼고, 결국 자마에서 한니발을 물리쳤다. 전쟁이 끝난 뒤 로마는 서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카르타고는 독립국으로 남았지만 군사력과 외교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이후 카르타고가 경제력을 회복하자 로마와의 긴장은 다시 높아졌고, 결국 제3차 포에니전쟁으로 이어졌다. 제2차 포에니전쟁은 단순히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맞붙은 전쟁이 아니라 로마가 이탈리아의 강국에서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과정이었다.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2026.10.01 오후 3:42 · 조회 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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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16 - 제2차 포에니전쟁 9 자마 전투와 한니발의 패배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격파했다.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 보병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로마군은 대열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코끼리가 지나가도록 유도했다. 이후 로마와 누미디아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몰아냈고, 전투 후반에는 다시 돌아와 카르타고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카르타고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고 로마에 강화를 요청했다. 기원전 201년 체결된 평화조약에 따라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 대부분을 포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또한 로마의 허가 없이 전쟁을 벌일 수 없게 되어 군사 활동에도 큰 제약을 받았다. 스키피오는 자마에서의 승리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한니발은 이후 카르타고의 정치에 참여했지만 로마의 압력을 피해 결국 망명했다. 제2차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고 로마의 서지중해 패권이 확립되었다.
2026.10.01 오후 3:32 · 조회 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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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16 - 제2차 포에니전쟁 9 자마 전투와 한니발의 패배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격파했다.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 보병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로마군은 대열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코끼리가 지나가도록 유도했다. 이후 로마와 누미디아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몰아냈고, 전투 후반에는 다시 돌아와 카르타고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카르타고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고 로마에 강화를 요청했다. 기원전 201년 체결된 평화조약에 따라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 대부분을 포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또한 로마의 허가 없이 전쟁을 벌일 수 없게 되어 군사 활동에도 큰 제약을 받았다. 스키피오는 자마에서의 승리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한니발은 이후 카르타고의 정치에 참여했지만 로마의 압력을 피해 결국 망명했다. 제2차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고 로마의 서지중해 패권이 확립되었다.
2026.10.01 오후 3:32 · 조회 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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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요약 16 - 제2차 포에니전쟁 8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로마군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그는 카르타고의 동맹국인 누미디아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마시니사와 동맹을 맺었다. 누미디아 기병은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로마군의 중요한 지원세력이 되었다.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에서 여러 전투와 공성전을 벌이며 카르타고 본토를 직접 압박했다. 위기가 커지자 카르타고는 이탈리아에 있던 한니발에게 귀환을 명령했다. 한니발은 오랫동안 머물던 이탈리아를 떠나 아프리카로 돌아왔지만, 그동안의 전쟁으로 충분한 병력과 기병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카르타고는 다시 한니발을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해 로마군과 맞설 준비를 했다. 스키피오 역시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 보병을 결합해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했다. 양측은 기원전 202년 자마에서 맞붙었다.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를 앞세웠지만 로마군은 대열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코끼리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2026.10.01 오후 3:31 · 조회 수 4

